유학일기

퀴어와 의도

비평의 눈 2023. 9. 14. 07:48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 다양하게 외모를 꾸민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성들, 짙은 검은색(마법사와 같은?) 화장을 한 사람들은

이제 크게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아직까지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는 풍경은 여장을 한 남성들이다.

여성 원피스, 망사 스타킹, 배꼽 티를 입은 남성들을 종종 보는데

아직까지 깜짝깜짝 놀란다.

 

한국에서 퀴어, 또는 퀴어와 관련된 분위기는 다소 집단화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평상시에는 숨어(?) 지내다가 예를 들어 '퀴어 축제'와 같은 대규모 행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한 두 사람이 일상에서 퀴어를 드러내기엔 힘들지만 다수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모인 곳에서는 좀 더 용기를 얻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퀴어 문화는 좀 강경한 모습니다.

어떤 문제의식이 있고 목적의식이 있다. 퀴어의 이면에 사상이 있고 운동이 있다.

예를 들어, 고정된 젠더 역할의 폭로랄지, 사회의식에 대한 도전이랄지 등등.

 

그런데 이곳에서는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인지

과연 이 사람들의 속마음에 어떠한 의도가 있는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아래 사진은 지난주 토요일 맨체스터 미술관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입구에서 미술관을 안내하는 직원이 방문객을 안내하는 모습이다.

 

이 직원의 속마음에

 

'왜 원피스는 여자만 입어야 하지? 나는 이 사회가 부여한 젠더 역할이 

마음에 안 들어. 나 자신부터 일상에서부터 이 고정된 역할에 균열을 내겠어'

라는 마음이 있었을까?

 

아니면 날씨도 더운데 마침 집에 원피스가 있어서 입고 나왔을까?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을 '남성'이라고 전제한 나의 관점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를 일)

 

아래 사진처럼 망사 스타킹을 입은 상체가 탄탄한 형님은 또 어떻고.

 

아무튼 이런저런 일상에서의 다양한 퀴어를 보면서 

나는 이 사람들이 퀴어라는 단어 자체를 과연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우리보다 좀 더 자유로운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일테고,

사회문화도 우리보다 덜 엄격할 테니,

남자는 이런 옷을 입고, 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 등등도 상당히 유연할 것이다.

본인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에게 부과된 젠더 역할이

희미하거나 모호하다면 사실 어떻게 입고 다니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미술관 직원을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그 원피스가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