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식당이나 상점의 개업 시기를 표기하기 위해 since를 주로 쓰는 것 같다.
since에는 '-- 이래로'라는 뜻이 있으므로 'since 2018'로 표기하며
2018년에 오픈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반면 이곳 영국에서는 est를 쓰는 듯하다.
established의 약자인 est는 설립된 시기를 뜻하므로 결국 since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는 est가 맞느냐, since가 맞느냐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약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오래된 것이 무조건 좋은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식당은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아들까지 3대째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만큼 오래되었으니 전통이 있고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맛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이고 맛은 맛이다.
그런데 since라는 단어는 구조적으로 오래되었음을 강조하는 단어다.
지난달에 오픈해서 따끈따끈한 물건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신규오픈'이라는 문구를 써서 홍보를 하고,
오래되어서 역사와 전통이 있고 그래서 음식이나 물건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since 설립연도'를 쓰는 것이다.
'since 1907'로 기재하여 100년이 넘게 운영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소비자의 기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재밌는 광경들을 볼 수가 있는데 주위에 버젓이 since 2020, since 2021 등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되어야 오래되었는지는 가치판단의 영역이므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저희 2년이나 영업했어요. 참 오래되었죠? 대단하죠?'라고 홍보하는 것 같아 낯 뜨겁다.
그냥 조용히 영업하다가 한 30-40년 지난 뒤에 since를 붙이면 어땠을까?
지난 주말 리버풀에 갔다. 영국의 대부분의 식당들이 유모차나 휠체어 고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는데 점심때 들른 Egg Cafe는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좁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건물이 고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길래 혹시나 싶어 밖에서 보니 건물 설립 연도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since를 붙일 수 있는 거 아닐까?
한국의 건물들은 이원화되어 있는 듯하다.
오래된 건물들은 남대문이나 하회마을처럼 관광지가 되어 있고 일반 시민들은 신식 건물을 사용한다.
재개발, 재건축이 선호되는 시대에 오래된 것들은 일상에 머물 자리가 없어 쫓겨나 있는 것이다.
우리로 따지면 진작 리버풀 관광청에서 관리해야 할 건물 같은데 Egg Cafe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일반 서민들을 맞이해 주는 풍경이 따뜻하다.
Egg Cafe에 관한 더 많은 사진은 아래 글 참조!
2023.08.16 - [영국 카페, 베이커리 산책] - Egg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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