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7.22(토) / 나의 잡(job)은 그게 아니에요.

비평의 눈 2023. 7. 24. 15:52

한국에서 짐이 무거워 이불이며 베개 등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

영국의 집들이 춥다고는 들었는데 여름 날씨치고는 잘 때 서늘한 정도였다.

와이프와 나는 다음날 바로 이불을 사기로 했다.

맨체스터 시내에 Primark라는 중저가 마트가 있었다.

이곳에 들려 이불이며 베개며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샀다. 

그런데 오전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이곳저곳을 다닌 터라 

체력이 고갈되었다. 

냄비며 여러가지 더 살 것들이 있는데 도저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와이프가 인근 마트에 가서 나머지 것들을 사고 나와 아들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있기로 했다.

 

내가 머물렀던 카페는 COSTA Coffee라는 곳인데 입구에 경비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경비원처럼 보이는 사람이니 아마 경비원일 것이다.

유모차 위에 짐을 잔뜩 얹어 놓은 상태에서 아들을 안고 있자니 무척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매장 안쪽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경비원이 눈앞에 보이는 매장 입구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 주문도 안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얄밉듯이 왠지 이곳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줄이 길어 유모차를 끌고 아들까지 안고 줄을 기다리자니 이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경비원이 나를 자꾸 보는 것 같아(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주문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생각해 낸 해결책은 이것이었다.

나는 경비원에게 가서 이렇게 얘기했다.

 

Excuse me sir, could you watch out my luggages over there?

하며 유모차와 유모차 위에 잔뜩 올려진 짐들을 가리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No, that's not my job.

 

나는 조금이나마 경비원을 기쁘게 하려고(무엇을 주문하려는 나의 모습을 통해)

그렇게 도움을 요청한건데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그래? 그럼 나도 이 모든 짐들을 끌고 뭘 살 수는 없어' 하며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서 다시 몇십 분이 지났다.

 

이제는 경비원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점심때 짠 베트남 음식을 먹은 여파로

목이 말랐다. 줄이 줄어든 것을 확인한 수 잽싸게 아들을 안고 물 하나를 

주문해서 자리로 돌아왔다. 

경비원은 나의 행동에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한국이었으면 어땠을까?

경비원의 업무는 어디까지일까? 물론 명시적으로 손님의 짐을 대신 살펴보는 업무가

업무분장에 기재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웬지 경비를 한다는 것은 포괄적으로 그런 것까지 포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네네 제가 봐드릴게요. 다녀오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사실 그 경비원은 전혀 바쁘지 않았고(나의 오해인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단호한 no가 나쁘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업무와 너의 업무를 구분하지 못하여

불필요한 갈등과 스트레스를 겪는지 모른다.

업무정의는 모든 것의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업무가 누구의 업무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들이 많다. 대신해주고, 도와주고, 같이 밤을 새 주고 하는 것들이 좋게 말하면 정이고

나쁘게 말하면 비효율적인 것이다. 

 

아,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을 때 단호하게 No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 이건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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